
개와 늑대의 시간, 그리고 사람과 AI의 시간
20년차 개발자가 AI와 함께 일하며 깨달은 것. 내가 아는 영역에선 개와 늑대가 구분되는데, 모르는 영역으로 가면 둘이 똑같아 보입니다. 사람과 AI의 경계가 흐려진 이 어스름을 어떻게 건너야 할까요.
프랑스에는 '개와 늑대의 시간(l'heure entre chien et loup)'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. 해가 지고 어스름이 깔릴 무렵, 저 언덕 너머에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 개인지 나를 노리는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을 뜻합니다. 빛이 애매해서, 반가운 것과 두려운 것의 경계가 잠시 흐려지는 그 순간 말입니다.
요즘 저는 자주 이 표현을 떠올립니다. 다만 지금 흐려진 것은 빛이 아닙니다. 사람과 AI의 경계인 것 같습니다.
완벽함을 의심하고 불완전함을 신뢰하는 시대
얼마전 메일 한 통을 받는데, 문장이 매끄럽고, 문단이 반듯하고, 인사말이 정중했습니다. 그 순간 저는 반가움보다 먼저 의심하게 되더군요. "이거, 사람이 쓴 거 맞나?" 반대로 오타가 하나 섞이고 문장이 살짝 어긋나면, 이상하게 안심이 되더군요. "아, 사람이구나."
우리는 어느새 완벽함을 의심하고 불완전함을 신뢰하기 시작한 거 같습니다. 예전에는 사람임을 증명하려고 일그러진 글자를 맞추고 했죠. 맞습니다. 캡차 말하는 겁니다. 이제는 오타와 망설임이 사람의 증명서가 되어버렸습니다. 참 묘한 시대입니다.
댓글도, 리뷰도, 목소리도, 영상도 마찬가지입니다. 그럴듯할수록 의심이 커지고, 어설플수록 마음이 놓입니다. 다가오는 실루엣이 너무 반듯하면 오히려 늑대가 아닐까 싶은, 그런 어스름 속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.
개발자의 어스름
저는 개발자입니다. 하루의 끝, 화면의 불빛만 남은 시간이 오면 저 역시 그 어스름 속에 있습니다. 여러 프로젝트를 AI와 함께 굴리다 보면, 어느 순간 이 커밋을 내가 짠 것인지 AI가 짠 것인지, 이 문구를 내가 다듬은 것인지 AI가 뽑은 것인지 헷갈립니다. 분명 조금 전까지 제가 붙잡고 있던 일인데도 그런거 같습니다.
신기한 것은, 제가 잘 아는 영역에서는 그래도 실루엣이 보인다는 점입니다. 개발 쪽은 어스름 속에서도 "저건 개, 저건 늑대" 하고 대충은 구분이 됩니다. 그런데 제가 잘 모르는 영역, 홍보나 마케팅으로 넘어가면 개와 늑대가 똑같이 생겼습니다. 둘 다 그럴듯해서, 어느 쪽이 나를 도우러 오는 것이고 어느 쪽이 나를 밀어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.
결국 실루엣을 구분하는 힘은 눈이 아니라, 그 대상을 얼마나 아느냐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. 내가 아는 만큼 어스름은 옅어지고, 모르는 만큼 어스름은 짙어집니다.
개인지 늑대인지보다 중요한 것
그래서 저는 요즘 조금 다른 질문을 해 봅니다. 다가오는 것이 개인지 늑대인지 끝까지 맞히는 일은, 어쩌면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. 어스름은 곧 밤이 되거나 아침이 될 테니까요.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애매한 시간을 어떻게 건너느냐입니다.
제 방식은 등불을 끄지 않는 것입니다. AI가 내놓은 것을 그냥 받지 않고, 제가 이해할 수 있을 만큼만 맡기고, 맡긴 만큼은 반드시 제 눈으로 확인합니다. 실루엣이 개인지 늑대인지 모르겠으면,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불빛을 비춰보는 수밖에 없습니다. 느려 보여도, 어스름 속에서는 그게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.
가끔은 이런 생각도 듭니다. 다가오는 것이 개인지 늑대인지 정하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라고요. 같은 실루엣도 내가 등불을 들고 마주 서면 개가 되고, 등을 돌리고 도망치면 늑대가 됩니다. AI를 어떻게 대할지도 아마 비슷할 것입니다.
마무리하며
솔직히 고백하자면, 이 글을 읽는 지금 여러분도 한 번쯤 의심하셨을지 모릅니다. "이 글, 사람이 쓴 거 맞아?" 그 의심이 바로 우리가 지금 어떤 시간을 지나고 있는지를 말해 준다고 생각합니다.
한번 맞춰 보세요..
개와 늑대의 시간은 원래 잠깐입니다. 사람과 AI의 시간도 언젠가는 지나가겠지요. 다만 그 사이를 건너는 동안, 저는 눈을 감기보다 조금 더 크게 뜨는 쪽을 택해 보려고 합니다.
여러분은 이 어스름을, 어떻게 건너고 계신가요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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